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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양연화에서 헤어질 결심으로 이어지는 감정의 계보

하지 않은 사랑과 지워 버린 사랑. 화양연화와 헤어질 결심은 표면적으로 전혀 다른 영화다. 시대도, 장르도, 이야기의 밀도도 다르다. 하지만 두 영화는 하나의 감정으로 연결되어 있다. 화양연화는 사랑을 완성하지 않음으로써, 헤어질 결심은 오히려 끝까지 책임지는 감정으로. 화양연화, 하지 않음으로 지켜낸 감정 왕가위의 화양연화에서 사랑은 행동하지 되지 않는다. 남녀는 이미 상대 배우자의 외도로 상처를 입었고, 그 상처는 새로운 욕망 앞에서 스스로를 제어하게 만든다. 이 영화의 핵심은 "왜 사랑하지 않았는가?" 가 아니다. 어떻게 끝내 사랑하지 않을 수 있었는가다. 손은 스치지만 잡지 않고, 감정의 고백하기 직전 망설인다. 감정은 계속 생성되지만, 행동으로 넘어가는 순간만은 끝내 허락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사랑은 타오르지 않고 응축된다. 응축된 감정은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다. 봉인된 채, 기억으로 남는다. 그래서 시대가 과거인 것이다. 헤어질 결심, 끝까지 가 보고 스스로를 지우는 감정 박 찬욱의 헤어질 결심은 정반대의 방향으로 출발한다. 이 영화에서 두 사람은 감정을 인정한다. 서로를 보고 느끼고 사랑을 하게 된다. 하지만 여기서 윤리는 다른 방식으로 작동한다. 하지 않음이 아니라, 지워야만 하는 상태에 도달한다. 형사는 사랑 때문에 붕괴되고, 여자는 사랑을 완성하기 위해 사라지는 선택을 한다. 완전히 삭제된다. 그 삭제는 회피가 아니다.
최근 글

Alec Soth, 받아 줄 수 있는 환경의 문화

  https://museemagazine.com/culture/2024/9/19/alec-soth-advice-for-young-artists-mack 알렉 소스의 사진을 처음 마주할 때 드는 감각은, 그것이 특정 인물을 찍은 초상이라는 사실보다도 하나의 문화가 개인을 어떻게 받아 안는가에 대한 풍경 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그의 프레임 안에서 사람들은 고립되어 있지만, 역설적으로 버려져 보이지는 않는다. 그들을 둘러싼 공기—도로의 먼지, 모텔의 커튼, 트럭의 녹슨 적재함, 겨울 햇빛—은 개인의 삶이 사회적 맥락 속에 놓여 있음을 조용히 증명한다. 소스의 사진은 고독을 말하지만, 그 고독은 사회로부터 완전히 단절된 절벽 위의 고독이 아니라, 사회라는 거대한 지형 위에 흩어진 점들의 고독이다. 그의 작업이 미국에서 널리 호응을 얻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미국 다큐멘터리 사진의 계보—Walker Evans, Robert Frank, Stephen Shore로 이어지는 시선—안에서 소스는 새로운 주제를 제시했다기보다, 이미 존재하던 시선을 동시대의 정서로 재번역했다. 즉 그는 ‘발견된 작가’라기보다 ‘이어진 작가’에 가깝다. 그가 찍는 인물들은 낯설지만, 그 낯섦을 읽는 방식은 문화적으로 충분히 학습되어 있다. 관객은 사진 속 인물을 이해하려 애쓰기보다, 그 인물을 둘러싼 서사를 자연스럽게 소비한다. 사진은 이미지이기 이전에 하나의 문장, 혹은 단편소설처럼 읽힌다. 반면 한국에서 유사한 작업이 놓이는 조건은 다소 다르다. 여기서 사진은 여전히 두 갈래의 시선 사이에 끼어 있다. 하나는 상업 이미지로서의 기능적 시선이고, 다른 하나는 투자 혹은 자산으로 환원되는 시장의 시선이다. 사진을 둘러싼 담론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작가 개인의 서사를 장기적으로 지지하고 축적하는 구조로까지 이어지지는 못한다. 대학의 학과는 존재하지만, 졸업 이후 작가를 받아 안는 제도적 완충지대는 얇다. 결과적으로 작가는 작품 생산자이면서 동시에 전시 기획자, 출판 제작...

영화 "기생충"이 아카데미 상을 받은 이유

  봉준호의 「기생충」이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은 이유는, 그 영화가 급진적이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안전하게 급진적인 척했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불평등과 계급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메시지를 철저히 장르 영화의 규범 안에 봉인해 둔다. 충분히 재미있고, 충분히 세련됐으며, 충분히 잘 만들어진 영화이기 때문에 관객은 불편함을 느끼되, 그 불편함을 현실의 윤리적 책임이나 정치적 행동으로 연결할 필요는 없다. 관객은 이 영화를 보고 “세상은 불공평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으로 자기 몫의 도덕적 역할을 끝낼 수 있다. 이 구조가 바로 아카데미가 역사적으로 가장 선호해 온 유형의 영화다. 리처드 브로디가 이 영화를 “본질적으로 보수적인 영화”라고 규정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기생충」은 불평등을 폭로하는 듯 보이지만, 그 폭로가 기존 질서를 흔들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하나의 불변하는 자연 상태처럼 고정시킨다. 김기우가 “그 집을 사겠다”고 말하는 마지막 장면은 희망의 선언이 아니라, 불가능성을 계산해 보이면 곧바로 무력화되는 자기기만이다. 봉준호 자신이 말했듯, 그 집을 사려면 547년이 걸린다. 이 영화는 그 잔인한 농담을 솔직함이라고 부르며 마무리한다. 그러나 이 솔직함은 체제를 고발하는 솔직함이 아니라, 체제를 받아들이는 솔직함에 가깝다. 더 나은 세계를 요구하지 않고, 더 나은 질서를 “필요로 한다”는 말로 끝낸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혁명적이지도, 급진적이지도 않다. 이 지점에서 「기생충」은 아카데미에 완벽히 들어맞는다. 이 영화는 자본주의의 어두운 진실을 말하는 듯 보이지만, 관객에게 아무 책임도 요구하지 않는다. 분노도, 행동도, 자기 위치에 대한 재고도 요구하지 않는다. 대신 관객에게 “나는 이 영화의 메시지를 이해하는 사람”이라는 도덕적 만족감을 준다. 이건 리처드 브로디가 말한 그대로 “아트하우스 관객의 세련됨을 아첨하는 태도”다. 관객은 박사장 편이 아니라고 느끼며 안도하고, 김기우 편이라고 느끼지도 않으면서, 그 둘 사이...

오후의 늙은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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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ONE ONE

 전쟁 전에 지어진 고집스럽고 낡은 건물들 위에 도사린 급수탑, 그보다 더 높이 솟아 있는 육중한 중앙 환기장치 같은 것들. 힘겹게 솟아 있는 고층 건물들 위에 똬리를 틀고 웅크린 환기장치들은 밖으로 밀려 나온 창자처럼 번들거렸다. 방수포로 마감한 임대주택의 지붕들. 가끔 계절에 맞지 않는 비치 의자가 반으로 접혀서 자갈밭에 서 있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저 아래 거리에서 돌풍에 휘말려 올라온 것 같았다. 저 의자의 주인이 누굴까? 그 사람은 도시의 구석진 곳들을 자신의 영역으로 확보하고 있을 것이다. 그는 계단 입구 위의 슬로건들을 가늘게 뜬 눈으로 바라보았다. 형광 페인트로 쓴 위협적인 말과 자기들끼리 통하는 언어로 된 선언. 다시 말해서 무능한 혁명가들의 흔적이었다. 창문마다 열려 있거나 반쯤 열렸거나 닫혀 있는 블라인드와 커튼이 펀치카드의 구멍 같았다. 아무 표시도 없는 어딘가의 쓰레기 매립지에 죽어서 묻혀 있는 컴퓨터 본체만이 그 암호를 해독할 수 있을 것이다. 창문에는 이 도시 시민들의 모습이 조각조각 전시되어 있었다. 불합리한 추론을 좋아하는 큐레이터가 기획한 전시 같았다. 도시 골퍼가 가느다란 줄무늬 옷을 입은 양다리를 쫙 벌려서 여과기 안에 집어넣고 있었다. 청록색 재킷을 입은 여자의 몸통 절반이 사다리꼴 창문을 통해 언뜻 보였다. 티타늄 책상 위에서는 누군가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욕실의 올록볼록한 유리 뒤편에서 그림자 하나가 움직이고, 살짝 열린 창문 틈으로 수증기가 슬금슬금 흘러나왔다. 그는 옛날 모습, 옛날 스카이라인을 떠올렸다. 맨해튼섬 여기저기에서 건물들이 서로 충돌했다. 수직으로 야심차게 뻗은 고층 건물들은 작은 건물에 굴욕을 안기고, 서로의 그림자 속에서 샐쭉해졌다. 필연성이 임기를 모르는 시장처럼 군림했다. 한때 유명했던 건축가들이 탄생시켜 멋들어진 이름을 지어준 어제의 승리자들은 내연기관이 내뿜는 검댕과 발전된 건축 기술에 모욕당했다. 세월이 우아한 석조 조각품을 끌처럼 두드려댄 탓에, 그 세공품들이 가루와 조각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