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어쩔수가 없다

   AI 시대에 놓인 한 실직 가장의 이야기다. 이성민과 염혜란이 부부로 등장하는데, 영화에서 가장 재밌고 또 가장 웃긴 구간이기도 하다. 생활의 결이 살아 있는 부부 호흡, 어쩔 수 없는 처지에서 나오는 자조 섞인 농담들. 웃음은 분명히 발생하는데, 그 웃음의 근원은 행복이 아니라 생존이다. 그래서 웃기지만 동시에 서늘하다. 코미디의 밀도는 구범모·이아라 부부와 유만수(이병헌)가 얽히는 장면들에 집중되어 있다. 상황은 계속 우스꽝스럽게 굴러가는데, 그 우스움이 인물들을 구원하지는 못한다. 오히려 더 궁지로 몰아넣는다. 박찬욱 감독이 상업영화의 문법을 적극적으로 끌어와 코미디를 배치했음에도, 영화의 뒷맛은 전혀 상업적이지 않다. 씁쓸하다 못해 쓰디쓰다. 상업영화의 외피를 두르고 있지만 정서의 결은 거의 아트영화에 가깝다. 웃으며 현실을 통과하게 만들지만, 극장을 나오는 순간 웃음은 바로 증발한다. 유만수는 수십 년 다니던 펄프 회사에서 해고된다. 3개월 안에 재취업을 해야 한다. 그는 알바를 전전하며 면접을 보지만 상황은 녹록지 않다. 집을 팔고 싶지 않고, 무엇보다 같은 업종으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 다른 일은 선택지가 아니라 임시 대피소에 가깝다. 그 마음은 그만의 것이 아니다. 재취업 경쟁자들 역시 전부 같은 처지다. (반장 한 명만 제외하고) 모두 실직 상태. 모두 같은 업종 희망. 모두 같은 자리 노림. 다른 직종으로 가라는 말은 공허하게 울린다. 몸의 리듬과 사고의 결이 이미 그 노동에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생각보다 쉽게 직업을 바꾸지 못한다. 생계 이전에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경쟁은 잔혹하다. 실직자들끼리 서로를 밀어내야 하는 구조. 만수는 결국 경쟁자들을 제거하고 재취업에 성공하고 집도 지키고 가정도 지킨다. 그런데 회사에 돌아가 마주하는 것은 동료들이 아니다. 자동화 설비, 기계 라인, 인간의 손을 대체한 시스템들이다. 재취업은 성공했지만, 인간 노동은 이미 퇴장 절차에 들어가 있다. 그 장면이 이 영화의 핵심이다...
최근 글

화양연화에서 헤어질 결심으로 이어지는 감정의 계보

하지 않은 사랑과 지워 버린 사랑. 화양연화와 헤어질 결심은 표면적으로 전혀 다른 영화다. 시대도, 장르도, 이야기의 밀도도 다르다. 하지만 두 영화는 하나의 감정으로 연결되어 있다. 화양연화는 사랑을 완성하지 않음으로써, 헤어질 결심은 오히려 끝까지 책임지는 감정으로. 화양연화, 하지 않음으로 지켜낸 감정 왕가위의 화양연화에서 사랑은 행동하지 되지 않는다. 남녀는 이미 상대 배우자의 외도로 상처를 입었고, 그 상처는 새로운 욕망 앞에서 스스로를 제어하게 만든다. 이 영화의 핵심은 "왜 사랑하지 않았는가?" 가 아니다. 어떻게 끝내 사랑하지 않을 수 있었는가다. 손은 스치지만 잡지 않고, 감정의 고백하기 직전 망설인다. 감정은 계속 생성되지만, 행동으로 넘어가는 순간만은 끝내 허락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사랑은 타오르지 않고 응축된다. 응축된 감정은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다. 봉인된 채, 기억으로 남는다. 그래서 시대가 과거인 것이다. 헤어질 결심, 끝까지 가 보고 스스로를 지우는 감정 박 찬욱의 헤어질 결심은 정반대의 방향으로 출발한다. 이 영화에서 두 사람은 감정을 인정한다. 서로를 보고 느끼고 사랑을 하게 된다. 하지만 여기서 윤리는 다른 방식으로 작동한다. 하지 않음이 아니라, 지워야만 하는 상태에 도달한다. 형사는 사랑 때문에 붕괴되고, 여자는 사랑을 완성하기 위해 사라지는 선택을 한다. 완전히 삭제된다. 그 삭제는 회피가 아니다.

Alec Soth, 받아 줄 수 있는 환경의 문화

  https://museemagazine.com/culture/2024/9/19/alec-soth-advice-for-young-artists-mack 알렉 소스의 사진을 처음 마주할 때 드는 감각은, 그것이 특정 인물을 찍은 초상이라는 사실보다도 하나의 문화가 개인을 어떻게 받아 안는가에 대한 풍경 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그의 프레임 안에서 사람들은 고립되어 있지만, 역설적으로 버려져 보이지는 않는다. 그들을 둘러싼 공기—도로의 먼지, 모텔의 커튼, 트럭의 녹슨 적재함, 겨울 햇빛—은 개인의 삶이 사회적 맥락 속에 놓여 있음을 조용히 증명한다. 소스의 사진은 고독을 말하지만, 그 고독은 사회로부터 완전히 단절된 절벽 위의 고독이 아니라, 사회라는 거대한 지형 위에 흩어진 점들의 고독이다. 그의 작업이 미국에서 널리 호응을 얻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미국 다큐멘터리 사진의 계보—Walker Evans, Robert Frank, Stephen Shore로 이어지는 시선—안에서 소스는 새로운 주제를 제시했다기보다, 이미 존재하던 시선을 동시대의 정서로 재번역했다. 즉 그는 ‘발견된 작가’라기보다 ‘이어진 작가’에 가깝다. 그가 찍는 인물들은 낯설지만, 그 낯섦을 읽는 방식은 문화적으로 충분히 학습되어 있다. 관객은 사진 속 인물을 이해하려 애쓰기보다, 그 인물을 둘러싼 서사를 자연스럽게 소비한다. 사진은 이미지이기 이전에 하나의 문장, 혹은 단편소설처럼 읽힌다. 반면 한국에서 유사한 작업이 놓이는 조건은 다소 다르다. 여기서 사진은 여전히 두 갈래의 시선 사이에 끼어 있다. 하나는 상업 이미지로서의 기능적 시선이고, 다른 하나는 투자 혹은 자산으로 환원되는 시장의 시선이다. 사진을 둘러싼 담론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작가 개인의 서사를 장기적으로 지지하고 축적하는 구조로까지 이어지지는 못한다. 대학의 학과는 존재하지만, 졸업 이후 작가를 받아 안는 제도적 완충지대는 얇다. 결과적으로 작가는 작품 생산자이면서 동시에 전시 기획자, 출판 제작...

영화 "기생충"이 아카데미 상을 받은 이유

  봉준호의 「기생충」이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은 이유는, 그 영화가 급진적이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안전하게 급진적인 척했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불평등과 계급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메시지를 철저히 장르 영화의 규범 안에 봉인해 둔다. 충분히 재미있고, 충분히 세련됐으며, 충분히 잘 만들어진 영화이기 때문에 관객은 불편함을 느끼되, 그 불편함을 현실의 윤리적 책임이나 정치적 행동으로 연결할 필요는 없다. 관객은 이 영화를 보고 “세상은 불공평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으로 자기 몫의 도덕적 역할을 끝낼 수 있다. 이 구조가 바로 아카데미가 역사적으로 가장 선호해 온 유형의 영화다. 리처드 브로디가 이 영화를 “본질적으로 보수적인 영화”라고 규정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기생충」은 불평등을 폭로하는 듯 보이지만, 그 폭로가 기존 질서를 흔들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하나의 불변하는 자연 상태처럼 고정시킨다. 김기우가 “그 집을 사겠다”고 말하는 마지막 장면은 희망의 선언이 아니라, 불가능성을 계산해 보이면 곧바로 무력화되는 자기기만이다. 봉준호 자신이 말했듯, 그 집을 사려면 547년이 걸린다. 이 영화는 그 잔인한 농담을 솔직함이라고 부르며 마무리한다. 그러나 이 솔직함은 체제를 고발하는 솔직함이 아니라, 체제를 받아들이는 솔직함에 가깝다. 더 나은 세계를 요구하지 않고, 더 나은 질서를 “필요로 한다”는 말로 끝낸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혁명적이지도, 급진적이지도 않다. 이 지점에서 「기생충」은 아카데미에 완벽히 들어맞는다. 이 영화는 자본주의의 어두운 진실을 말하는 듯 보이지만, 관객에게 아무 책임도 요구하지 않는다. 분노도, 행동도, 자기 위치에 대한 재고도 요구하지 않는다. 대신 관객에게 “나는 이 영화의 메시지를 이해하는 사람”이라는 도덕적 만족감을 준다. 이건 리처드 브로디가 말한 그대로 “아트하우스 관객의 세련됨을 아첨하는 태도”다. 관객은 박사장 편이 아니라고 느끼며 안도하고, 김기우 편이라고 느끼지도 않으면서, 그 둘 사이...

오후의 늙은 빛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