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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ec Soth, 받아 줄 수 있는 환경의 문화

 

https://museemagazine.com/culture/2024/9/19/alec-soth-advice-for-young-artists-mack







알렉 소스의 사진을 처음 마주할 때 드는 감각은, 그것이 특정 인물을 찍은 초상이라는 사실보다도 하나의 문화가 개인을 어떻게 받아 안는가에 대한 풍경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그의 프레임 안에서 사람들은 고립되어 있지만, 역설적으로 버려져 보이지는 않는다. 그들을 둘러싼 공기—도로의 먼지, 모텔의 커튼, 트럭의 녹슨 적재함, 겨울 햇빛—은 개인의 삶이 사회적 맥락 속에 놓여 있음을 조용히 증명한다. 소스의 사진은 고독을 말하지만, 그 고독은 사회로부터 완전히 단절된 절벽 위의 고독이 아니라, 사회라는 거대한 지형 위에 흩어진 점들의 고독이다.

그의 작업이 미국에서 널리 호응을 얻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미국 다큐멘터리 사진의 계보—Walker Evans, Robert Frank, Stephen Shore로 이어지는 시선—안에서 소스는 새로운 주제를 제시했다기보다, 이미 존재하던 시선을 동시대의 정서로 재번역했다. 즉 그는 ‘발견된 작가’라기보다 ‘이어진 작가’에 가깝다. 그가 찍는 인물들은 낯설지만, 그 낯섦을 읽는 방식은 문화적으로 충분히 학습되어 있다. 관객은 사진 속 인물을 이해하려 애쓰기보다, 그 인물을 둘러싼 서사를 자연스럽게 소비한다. 사진은 이미지이기 이전에 하나의 문장, 혹은 단편소설처럼 읽힌다.

반면 한국에서 유사한 작업이 놓이는 조건은 다소 다르다. 여기서 사진은 여전히 두 갈래의 시선 사이에 끼어 있다. 하나는 상업 이미지로서의 기능적 시선이고, 다른 하나는 투자 혹은 자산으로 환원되는 시장의 시선이다. 사진을 둘러싼 담론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작가 개인의 서사를 장기적으로 지지하고 축적하는 구조로까지 이어지지는 못한다. 대학의 학과는 존재하지만, 졸업 이후 작가를 받아 안는 제도적 완충지대는 얇다. 결과적으로 작가는 작품 생산자이면서 동시에 전시 기획자, 출판 제작자, 홍보 담당자, 영업자가 된다. 예술가의 노동은 창작 이전에 생존의 행정으로 분산된다.

이 차이는 단순히 시장 규모의 문제가 아니라, 이미지에 대한 사회적 독해 습관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소스의 사진 속 인물들은 기이하거나 주변적이지만, 그들의 삶은 공공의 서사로 읽힌다. 반면 한국에서 주변부의 이미지는 종종 개인의 사적 불행으로 축소되거나, 반대로 미학적 소비의 대상으로만 소비된다. 고독은 사회적 언어로 번역되기보다, 개인의 사연으로 봉합된다. 사진이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 되기보다, 개인의 취향을 드러내는 장식으로 머무는 순간이다.

그렇다고 해서 한국에서 소스와 같은 작업이 불가능하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오히려 질문은 다른 곳에 있다. 만약 소스가 한국에서 작업했다면, 그는 미국 중서부의 모텔 대신 어떤 장소를 택했을까. 폐쇄된 지방 소도시의 여관, 재개발 직전의 아파트 단지, 혹은 겨울 공단의 기숙사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이미지의 대상이 아니라, 그 이미지를 사회가 읽어내는 방식이다. 문화는 작품을 낳기도 하지만, 작품을 해석하는 언어를 함께 생산한다.

결국 소스의 사진이 보여주는 것은 개인의 얼굴이 아니라, 그 얼굴 뒤에 놓인 문화적 토양이다. 그의 인물들이 쓸쓸해 보이면서도 존엄을 잃지 않는 이유는, 그들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이 완전히 냉소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사진은 작가 혼자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회와 공동 제작되는 매체라는 사실을 새삼 환기한다.

그래서 그의 사진을 한국의 맥락 위에 놓고 바라볼 때, 우리는 두 겹의 풍경을 동시에 보게 된다. 하나는 프레임 안의 인물이고, 다른 하나는 그 프레임 바깥—즉 그 이미지를 지지하거나 외면하는 문화의 구조다. 어쩌면 우리가 느끼는 거리감은 이미지의 낯섦 때문이 아니라, 그 이미지를 둘러싼 토양의 밀도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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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ONE ONE

 전쟁 전에 지어진 고집스럽고 낡은 건물들 위에 도사린 급수탑, 그보다 더 높이 솟아 있는 육중한 중앙 환기장치 같은 것들. 힘겹게 솟아 있는 고층 건물들 위에 똬리를 틀고 웅크린 환기장치들은 밖으로 밀려 나온 창자처럼 번들거렸다. 방수포로 마감한 임대주택의 지붕들. 가끔 계절에 맞지 않는 비치 의자가 반으로 접혀서 자갈밭에 서 있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저 아래 거리에서 돌풍에 휘말려 올라온 것 같았다. 저 의자의 주인이 누굴까? 그 사람은 도시의 구석진 곳들을 자신의 영역으로 확보하고 있을 것이다. 그는 계단 입구 위의 슬로건들을 가늘게 뜬 눈으로 바라보았다. 형광 페인트로 쓴 위협적인 말과 자기들끼리 통하는 언어로 된 선언. 다시 말해서 무능한 혁명가들의 흔적이었다. 창문마다 열려 있거나 반쯤 열렸거나 닫혀 있는 블라인드와 커튼이 펀치카드의 구멍 같았다. 아무 표시도 없는 어딘가의 쓰레기 매립지에 죽어서 묻혀 있는 컴퓨터 본체만이 그 암호를 해독할 수 있을 것이다. 창문에는 이 도시 시민들의 모습이 조각조각 전시되어 있었다. 불합리한 추론을 좋아하는 큐레이터가 기획한 전시 같았다. 도시 골퍼가 가느다란 줄무늬 옷을 입은 양다리를 쫙 벌려서 여과기 안에 집어넣고 있었다. 청록색 재킷을 입은 여자의 몸통 절반이 사다리꼴 창문을 통해 언뜻 보였다. 티타늄 책상 위에서는 누군가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욕실의 올록볼록한 유리 뒤편에서 그림자 하나가 움직이고, 살짝 열린 창문 틈으로 수증기가 슬금슬금 흘러나왔다. 그는 옛날 모습, 옛날 스카이라인을 떠올렸다. 맨해튼섬 여기저기에서 건물들이 서로 충돌했다. 수직으로 야심차게 뻗은 고층 건물들은 작은 건물에 굴욕을 안기고, 서로의 그림자 속에서 샐쭉해졌다. 필연성이 임기를 모르는 시장처럼 군림했다. 한때 유명했던 건축가들이 탄생시켜 멋들어진 이름을 지어준 어제의 승리자들은 내연기관이 내뿜는 검댕과 발전된 건축 기술에 모욕당했다. 세월이 우아한 석조 조각품을 끌처럼 두드려댄 탓에, 그 세공품들이 가루와 조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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