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의 「기생충」이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은 이유는, 그 영화가 급진적이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안전하게 급진적인 척했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불평등과 계급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메시지를 철저히 장르 영화의 규범 안에 봉인해 둔다. 충분히 재미있고, 충분히 세련됐으며, 충분히 잘 만들어진 영화이기 때문에 관객은 불편함을 느끼되, 그 불편함을 현실의 윤리적 책임이나 정치적 행동으로 연결할 필요는 없다. 관객은 이 영화를 보고 “세상은 불공평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으로 자기 몫의 도덕적 역할을 끝낼 수 있다. 이 구조가 바로 아카데미가 역사적으로 가장 선호해 온 유형의 영화다.
리처드 브로디가 이 영화를 “본질적으로 보수적인 영화”라고 규정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기생충」은 불평등을 폭로하는 듯 보이지만, 그 폭로가 기존 질서를 흔들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하나의 불변하는 자연 상태처럼 고정시킨다. 김기우가 “그 집을 사겠다”고 말하는 마지막 장면은 희망의 선언이 아니라, 불가능성을 계산해 보이면 곧바로 무력화되는 자기기만이다. 봉준호 자신이 말했듯, 그 집을 사려면 547년이 걸린다. 이 영화는 그 잔인한 농담을 솔직함이라고 부르며 마무리한다. 그러나 이 솔직함은 체제를 고발하는 솔직함이 아니라, 체제를 받아들이는 솔직함에 가깝다. 더 나은 세계를 요구하지 않고, 더 나은 질서를 “필요로 한다”는 말로 끝낸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혁명적이지도, 급진적이지도 않다.
이 지점에서 「기생충」은 아카데미에 완벽히 들어맞는다. 이 영화는 자본주의의 어두운 진실을 말하는 듯 보이지만, 관객에게 아무 책임도 요구하지 않는다. 분노도, 행동도, 자기 위치에 대한 재고도 요구하지 않는다. 대신 관객에게 “나는 이 영화의 메시지를 이해하는 사람”이라는 도덕적 만족감을 준다. 이건 리처드 브로디가 말한 그대로 “아트하우스 관객의 세련됨을 아첨하는 태도”다. 관객은 박사장 편이 아니라고 느끼며 안도하고, 김기우 편이라고 느끼지도 않으면서, 그 둘 사이 어딘가의 안전한 중산층 위치로 되돌아간다.
이 영화가 외국어 영화였다는 점 역시 아카데미 수상에 결정적으로 유리하게 작용했다. 「기생충」은 미국의 계급 문제를 정면으로 비추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을 한국 이야기로 외주화한다. 미국 관객은 이 영화를 보며 자기 사회를 떠올릴 수는 있어도, 자기 사회를 직접 비난받는 느낌은 받지 않는다. “한국은 더 심하네”라는 거리감이 자동으로 생긴다. 이 거리감 덕분에 영화는 급진적으로 보이면서도 안전하다. 바로 이 지점이 2019~2020년의 아카데미가 가장 필요로 하던 영화의 자리였다. 다양성과 진보성을 증명해야 했던 시기의 아카데미는, 미국이 아닌 영화로 미국의 문제를 말해주는 작품을 원했다. 「기생충」은 그 요구를 거의 완벽하게 충족시켰다.
그래서 이 영화의 결말은 상을 받기 딱 좋은 결말이다. 이 결말은 희망을 주지 않지만, 그렇다고 분노를 조직하지도 않는다. 이 결말은 관객에게 이렇게 말한다. “세상은 원래 이렇다. 슬프지만, 우리는 어쩔 수 없다.” 이건 냉정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가장 순한 형태의 보수성이다. 체제를 바꿀 수 없다는 인식을 ‘성숙한 현실 인식’으로 포장해 주기 때문이다. 관객은 이 영화를 보고 깊은 영화를 봤다고 느끼며 극장을 나온다. 그리고 아무것도 바꾸지 않는다.
이 점에서 「기생충」이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은 것은 아이러니가 아니라 논리적 필연이다. 이 영화는 불평등을 말하면서도 질서를 흔들지 않고, 비판하는 듯 보이면서도 체제를 보호하며, 불편하게 만들면서도 관객을 도덕적으로 안전하게 만든다. 아카데미는 이런 영화를 사랑해 왔고, 앞으로도 사랑할 것이다. 그래서 「기생충」이 작품상을 받은 이유는 단 하나다. 이 영화가 너무 잘 만들어진 보수적 영화였기 때문이다.
댓글
댓글 쓰기